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리스 시테이폰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 밍명 이후부터 한동안은 군사(軍史) 및 군사학 연구에 전념하면서 군사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1941년에는 [[나치 독일]]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 점령하게 되면서 시테이폰은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숨겼다. 1943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위시한 공산주의 파르티잔이 활동하기 시작하자 전직 러시아 제국 군인인 [[미하일 스코로두모프]] 장군의 제안을 따라 러시아 보호군의 지휘관으로 참여하게 된다. 러시아 보호군의 창설에 즈음하여, 스코로두모프 장군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나치 독일의 온갖 검증을 통과해야 했다. 러시아 제국 출신 자원부대의 백계 러시아인 지휘관들은 투철한 반공주의 및 러시아 제국에 대한 모종의 재건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나치 독일의 입장에서는 다소 독립적으로 움직이려는 러시아 보호군을 고깝게 바라보았고 러시아 보호군의 결성 및 창설에 주도적이었던 스코로두모프를 해임시키게 된다. [[게슈타포]]의 검증을 통과한 시테이폰은 스코로두모프를 대신하여 러시아 보호군을 이끌게 된다. 시테이폰은 독일 국방군에 [[동부전선(제2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으로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여느 나치에 부역한 러시아계 자원부대들이 그렇듯이 [[아돌프 히틀러]] 및 수뇌부가 불신하였기 때문에 동부전선에는 투입되지 않았다. 대신 동남부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공산주의 파르티잔을 토벌, 진압하는 데에 주로 투입되었고 러시아계 나치 부역 자원부대의 지휘관들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의 연장선에서 투철히 공산주의 파르티잔을 토벌하는데 앞장섰다. 특히나 러시아 보호군은 일련의 활동이 끝나면 러시아로 돌아가 공산주의를 몰아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던 탓도 있다. 전황이 독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1944년에는 당도한 [[소련군]]에 대적하기도 하였으며, 이 해에 시테이폰은 국방군으로부터 중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또한 시테이폰은 [[안드레이 블라소프]] 중장을 만나 [[러시아 해방군]]에 합류하는 것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독일군의 전황이 완전히 패색이 짙어지자 시테이폰이 이끄는 러시아 보호군을 비롯하여 [[러시아 해방군]]은 생존을 위해 독일군과도 손절하였고, 영국군과 미군을 찾아 항복을 위해 싸워나갔고 영국군에 항복한다. 그나마 러시아 해방군과 달랐던 점은, 러시아 보호군 소속의 군인들은 완전히 이민하여 국적을 바꿨기 때문에 [[얄타 회담]]에서 논의된 소련 또는 러시아 제국 국적자들의 소련 송환에 저촉되지 않았다. 시테이폰은 나치 독일이 항복을 일주일 앞둔 1945년 4월 30일에 심부전으로 [[자그레브]]에서 사망한다. 당시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었던 백계 인사였던 알렉세이 폰 람페는 회고록에서 시테이폰이 군의관에게 약물투여를 요구하였으며 투약 후 그대로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대인의 혈통이었음에도 이를 숨기고 나치 독일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류블랴나]]의 독일군 묘지에 묻히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